모데라토 칸타빌레

#1. 연애의 비극적 종결?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안느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안타깝고, 그 눈물이 가슴 아프다면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안느가 이미 결혼한 여성이라서, 쇼뱅이 노동자 신분이어서, 혹은 불륜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으로 인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느와 쇼뱅의 만남은 이렇게 끝난다. 소설도 거기에서 끝난다. 어쩌면 작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안느가 가여운 것은 그들의 사랑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라고. 혹은 적어도 그러한 결별의 장면에서 그녀 삶의 비극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고. 그러나 나는 이 만남이 왜 이러한 언어적 죽음으로 귀결되었는지 안타까워하기 전에, 그녀의 불만족과 초조함이 왜 사랑이라는 것으로 나타나야 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안느가 진정으로 원했고, 혹은 필요로 했던 것은 쇼뱅과의 사랑이나 억압된 성적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소설이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맺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애착과 열망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2. 개시 -  비명의 매혹.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그것은 안느가 지속해 온 삶의 리듬이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던 그녀의 아이처럼,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안느의 연주 방식, 그녀가 생의 건반을 두드리는 방식 말이다. 마치 춤추는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제멋대로 흘러가 버리는 삶의 즐거운, 그리고 처연한 안느의 피아노 소리. 춤을 멈추기 위해서 발목을 잘라야 했던 어느 동화의 주인공처럼 어쩌면 안느도 음악을 그치기 위한 죽음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피아노 소리 위로 끼어든 느닷없는 비명소리에 그녀가 매료된 것도, 거기에서 그 종결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날카로운 비명 소리, 죽은 여자, 피로 범벅된 남자의 입맞춤이 안느의 삶을 헤집어 놓는다. 그런데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자가 처음 본 대상에게 사랑에 빠지듯이, 살인 현장의 충격 혹은 도취에 젖은 채로 카페에 찾아온 안느는 쇼뱅을 만난다. 이른 저녁, 해는 넘어가고 아직 어두워지지는 않은 채로 남겨진 그 애매한 공기에 취해서, 카페의 값싼 포도주에 취해서, 안느는 사랑을 꿈꾸고, 죽음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안느의 연인은 쇼뱅이 아니었던 다른 누구라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갈망했던 것은 어떤 것이든 다른 종류의 것, 자꾸만 침잠하는 삶의 연주를 종결시킬 만큼 이질적인 무언가였을 뿐이다.


#3. 전개 - 강박적 대화.

이미 안느는 모두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있을만큼 힘들어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잠들어야 하는, 명령처럼 주어진 시간의 목소리가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십 년 동안의 지고지순한 시간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불안감, 초조함, 강렬한 감정에 대한 갈망 따위를 떨쳐 두어야 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일관되어 온 그녀의 삶에서, 쇼뱅과의 만남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연주되는 시간인 것처럼 보였다.

쇼뱅과 만날 때마다, 알 수 없이 초조하고, 기묘하게 흥분되고, 마음이 가쁘고, 절박하고, 게다가 곧 끝나버릴 것이기에 더 집착하려는 감정이 안느를 사로잡는다. 쇼뱅이 주지시키듯, 매번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렇기에
안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침묵이다. 그녀는 긴박한 이 리듬이 중단되지 않도록 애쓴다. 어찌할 바 모르는 아이처럼 말을 이어가고, 서로를 재촉해댄다. 대화가 엇갈리고, 자꾸만 튕겨나간다 해도 오로지 그들은 어떻게든 이어나가기를 원할 뿐이다. 그들의 시간은 안타깝다. 말이 어긋나거나 느낌이 일그러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생겨나는 애처로움이다.



#4. 종결 - 만취와 구토.

절정의 순간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그녀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였다. 그녀는 실제의 삶에 균열을 가하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카페로 와서 쇼뱅을 만나고 심각한 말장난을 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비현실의 시간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마 그녀 자신도 그것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포도주가 그 증거이다. 술은 일상과 비일상, 그녀가 연주해 온 음악과 새롭게 끼어든 소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해줄 만한 여린 감성 상태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마취제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녀가 매혹되었던 시간이 아무리 감미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까지 가꾸어 놓은 삶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부둣가를 놀다가도 엄마를 찾아 돌아오는 그녀의 아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가지는 불안감의 형태로 말이다. 안느는 자신이 꾸려온 삶, 무엇보다도 아이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릴만큼 단호하지 못했고, 번번이 그 협박에 겁을 먹는다. 그 위기의 절정이란, 그녀가 사교파티에 늦었던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취기어린 일탈을 소화해낼 만큼 거뜬하지 못했던 것이다.


#5. 모데라토 칸타빌레, 그 이후?

그렇다면 다시, 이 글에서 처음 말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는 안느의 삶 자체에만 눈이 간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 쇼뱅, 남편이라는 인물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존하는 관계들 속에 놓여있는 그녀의 상태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목격한 카페사건이나, 쇼뱅과의 대화에서와 같이 손쉽게 죽을 수 있는, 그렇게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어야 하고,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서도 안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안느와 쇼뱅의 만남은 언어로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종결이 비극적이기만 한 지 질문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무수한 신파극과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사회적 요구와 윤리적 기준 때문에 본능 혹은 성적 욕구를 억눌렀던 안느의 절제력에 대한 감동을 요구하는 이상일 수가 없다. 
나는 안느가 쇼뱅과의 만남을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제까지 안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지긋지긋해 했고, 그에대한 부정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그와는 다른 것, 나아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카페의 살인사건을 자꾸만 불러 일으키고, 쇼뱅이라는 인물에 그것을 덧씌우고, 그 관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안느는 그 속에서 여전히, 어쩌면 더욱 심하게 울부짖을 뿐이다. 이내 허물어질 것을 알면서 쌓아올리려던 그 노력은 결국 실패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안느는 그녀의 삶에 새로운 리듬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삶을 굴러가게 할 만한 건강한 리듬이 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거기에서 가능성을 본다. 잘 되어버려서, 혹은 일말의 희망이 살아 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그녀가 꿈꿨던, 그녀를 삼킬 뻔했던 절실한 상상과 열망이 모두 부서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날 것 그대로의 남겨진 삶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처절한 가능성 말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싫다고 해서 손을 멈춘다면 피아노 연주는 계속될 수 없다. 나는 그녀가 허무감과 괴로움으로 생을 내팽개치기 보다는, 그 널브러진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주 방식을 스스로 캐나가기를 바란다.  

by 이닥 | 2008/04/14 03:39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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